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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점

'나'들의 도미노 게임

'나'들의 도미노 게임

인상 깊은 계절을 떠올리려니 어려웠다. 감각을 통해 전해져오는 것들에 많이 무심했구나, 생각했다. 계절이 변하는 길을 걸으면서도 언제나 생각 속에만 빠져있었던 것 같다. 매미가 쨍하게 울고 압력 밥솥에 찜 찌듯 더운 한국의 여름 더위를 언제 유난히 느꼈더라 깊게 고민해봤는데 내 기억의 데이터베이스에서는 결국 아무것도 못찾았다. 기껏 찾아냈던 게 ‘아, 영화 <우리들>에서 피구하는 장면이 더워보였는데-’, ‘최강희가 나왔던 드라마 <한여름의 추억>에 그런 전형적인 여름이 나오던데-’ 하는 생각들이었다. 다른 계절도 비슷하다. 빛이 번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봄의 풍경도, 깊은 숨을 들이마시게 하는 맑은 가을 날씨도, 심장이 쪼이도록 차가운 겨울의 공기도, 머리로는 잘 알지만 내 기억 속에서 꺼내쥘 수 있는 흔적은 놀랍도록 없다.

영어 시간에 처음 과거분사를 배웠을 때 ‘대과거’라는 개념을 듣고 약간 소름이 돋았었다.
그냥 과거도 아니고 ‘대’ 과거이기 때문이다. 공룡 뼈가 수천년에 걸쳐 퇴적되고 또 수천년이 지나 지반이 융기하여 화석으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듯, 너무 과거라서 절대 바꿀 수 없고 무섭도록 고정되어있는 흑역사 그 자체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대과거를 배울 때마다 대과거 안에 그대로 박제되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떠올렸다.

하지만 가끔 (사실 자주) 그 아득한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이 마치 화살을 쏜듯 지금의 나에게 박힐때가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서일까. 대과거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에 큰 진전이 없다고 느낄 때 특히 그렇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가 어디가서 손해를 볼까봐 불안해하고 애잔해하셨다. 싸우는 걸 싫어하고 자기 주장이 없어서 친구들과 있을 때 주로 친구들 좋은 방향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하도 많아서, 머리가 좀 크고 나서는 내가 손해본(?) 에피소드들을 엄마로부터 숨기는 노하우가 생겼다. 갈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 언제부턴가 엄마에게 내 주변인들은 모두 천사 또는 성인군자로 소개됐었다. 그런데 엄마의 시선이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체득이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괜히 손해보는 것 같으면 엄마보다 내가 나를 먼저 꾸짖었다. 약간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 같으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쯧쯧대며 나를 탓한다. 나를 그렇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채찍은 섬광처럼 다가오는 ‘손해를 봐서 혼이 났었던 과거의 나’들이다. ‘손해를 본 나’들의 그룹이 차곡차곡 개어져 어떤 폴더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손해본 나’들의 그룹말고도 아주 많은 소그룹들이 있다. 새로운 시작을 했다가 늘 후회하며 앞으로는 시작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던 나들, 결국엔 고민끝에 그만두던 나들, 연인에게 ‘니가 원하는게 뭐냐’는 말을 듣고 진짜로 내가 원하는게 뭔지 몰라서 혼란에 빠졌던 나들, 침대에 누워 늘 똑같은 천장을 쳐다보며 ‘내 삶은 왜이렇게 달라지는 게 없지’ 생각하는 나들, 12월 31일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는 정확히 내 묘비명이라고 생각하는 나들…. 참으로 다양한 ‘나’들이 컴퓨터 프리셀 게임을 이겼을 때 나오는 도미노 화면처럼 가지런히 일렬종대해있다. 그리고 늘 똑같은 모습으로 함께 넘어진다.

멀티버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에 포진되어있는 똑같은 ‘나’들. 내용은 같지만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여러명의 ‘나’들을 보며, 내 세상은 시간순이 아니라 사건별로 조직되어있다고 느낀다. 사건의 네트워크속에서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들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다. 비슷한 사건이 반복될 수록 강화된 메시지가 전해온다. (“이번에도 또…!!!”)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메시지를 전하진 못한다. (“제발 이번에는 다른 행동을 해서, 나를 이 속박에서 벗겨주렴!”)

시간은 꼭 선형적인 것이 아니지만 지금의 내가 시간의 장막을 뚫고 과거의 나에게 직접 부탁을 건넬 수는 없다는 점. 그 점이 시간의 질서라면 질서인것 같다.





덧글)

저도 이번에 글을 써보니 여행 외에는 일상적으로 계절을 감각적으로 기억하지는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랫만에 ‘대과거’의 뜻을 생각해보니 정말 아득해지네요. 과거의 실수가 반복되서 사건별로 조직된 ‘나’의 시간들이라니 ㅋㅋ 귀엽고 안쓰러운 느낌이에요. 반대로 미래 시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시는지 궁금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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